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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증장애어린이 한빛이와 아버지의 좌충우돌 모험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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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회 1,179회 작성일 10-07-13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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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사회에서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 그리고 장애자녀를 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시간을 삼킨 아이’는 중증장애자녀를 키우면서 한 아버지가 겪는 이야기로, 우리사회에서 장애인이 처해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책이다.

이 책은 장애자녀를 둔 한 아버지의 가슴 아픈 육아일기며, 장애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차별과 싸우면서 힘겹게 써내려간 투쟁의 기록이자, 장애어린이와 그 아버지가 만들어가는 삶과 희망의 메시지다.

지은이는 레녹스 가스토 증후군을 앓고 있는 복합장애 1급인 아들 ‘한빛’이의 돌보미다. 참교육시민모임에서 활동했다. 현재는 함께가는 서울장애인부모회의 회장을 맡고 있으며 교육, 노동, 자립 생활 등 장애인의 권리와 복지를 위해 애쓰고 있다.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살아온 아이

아이가 태어났다. 3.8킬로그램의 건강한 사내아이다. 그런데 아이는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세균성 뇌수막염에 걸려 눈도 뜨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병원에서 들었던 첫마디는 “99.9퍼센트 가망이 없습니다”. 의사들도 간호사들도 말을 걸지 않았다. 복도에서도 병실에서도 우리는 늘 혼자였다.
아이 엄마는 매일 눈물이었다. 아이 엄마와 약속을 했다. 절대 울지 않기로. 그리고 밥은 무조건 챙겨먹기로. 이것을 지키지 못하면 집에서 결과만 기다리기로 했다. 무의식 상태의 아이에게 김광석의 노래 [일어나]를 들려주며 일어나기만 하면 세상은 네 것이 될 것이고, 또 반드시 되도록 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러니 너는 다른 생각하고 그저 일어나서 눈만 맞추면 된다고 정말 열심히 이야기를 해주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꼭 잡은 고사리 손에서 전달되는 미세한 움직임, 가느다란 손끝의 떨림. 녀석은 그렇게 세상으로 다시 나왔다. 간호사를 찾고 의사를 찾으면서 움직였다고 분명 손가락을 움직였다고 병원이 떠나갈 듯 외치며 미친 사람마냥 뛰어다녔다.


중증 장애아 한빛이와 아버지 앞에 펼쳐진 ‘일상’이라는 험난한 모험

한빛이는 레녹스 가스토 증후군을 앓고 있다. 어릴 적 세균 감염 때문인데, 뇌가 손상되어 작아지고 이미 절반 이상의 뇌 기능이 상실되었다. 그 결과 지적 발달 장애와 간질을 얻어 한빛이는 열네 살이 되었지만 여전히 언어적 의사소통이 되지 않고, 크고 작은 경기를 하루에도 열 번이 넘게 일으킨다. 넘어지고, 머리가 깨지고, 이가 빠지고, 온몸에 멍이 든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온 한빛이에게 삶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한빛이와 가족들에게 일상이란 마치 매일 전투를 치르는 것과 같다.

[시간을 삼킨 아이]는 아버지가 생업을 뒤로 한 채 한빛이를 돌보며 겪은 좌충우돌의 모험담이며, 장애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차별과 편견에 싸워온 기록이다.
그러나 이 책은 장애를 극복한 한 개인의 눈물겨운 성공담이 아니다. 오히려 단단한 벽과 같은 현실 속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평범한 장애인 가족이 느끼는 고충과 절망이 담담하게, 때로는 달관한 표정으로 그려진다. 그 속에 진짜 현실이, 진실이 있다.

기대는 해보지만 별 소득 없는 의사와의 대화, 늘 고맙지만 때로는 서운한 담임선생님과의 티격태격, 겉으로는 남의 일 말하듯 초연하게 웃지만 실제로는 속이 타들어가는 아버지의 심정, 서로를 감옥으로 여기는 장애아와 부모의 현실. 하지만 장애도, 질병도, 사회의 현실도 한빛이와 아버지를 막을 수 없다. 오늘 하루도 둘은 웃으며 삶의 높은 파도를 헤쳐나간다.


한빛이, 학교에 가다

이제 열네 살, 한빛이는 초등학교 4학년이다. 그러나 한빛이는 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나 특수학급이 아니라 일반 학생들과 통합학급에서 생활하고 있다. 처...음에는 받아주는 학교도 없었고, 교육 당국도 법에 명시된 의무를 이행할 의지가 없었다. 2년을 실랑이한 끝에 입학하게 되었지만 난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등교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수업 시간에 어우러져 앉아 있는 자체가 힘겹다. 한빛이가 학교에서 경기를 하거나 돌발 행동이라도 하면 교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비장애인 학생들과 관계 맺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들은 자기보다 크지만 모자란 한빛이를 처음에는 이상한 아이로 여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장난감 대하듯 하기도 한다. 물론 어른들보다 더 성숙하게 잘 대해주는 대견한 아이들도 있다. 한빛이의 학교생활은 한 고개를 넘으면 또 다른 고개가 버티고 있는 끝이 없는 산행길이다.
몸도 불편하고 말도 잘 못하는 아이가 힘들게 비장애인 학생들 틈에서 같이 교육을 받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물을 사람도 있겠다. 한빛이 아버지도 아이의 경기가 심해지면서 학교 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수없이 되물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빛이 아버지는 ‘보고, 느끼고, 듣고, 판단하게 하라’는 원칙 아래 다양한 경험을 하고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가장 중요한 교육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오늘도 한빛이는 학교로 가서 친구들을 사귀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캠프와 장거리 여행을 떠난다.

웃고 살기에도 삶은 부족하다.

요즘 들어 한빛의 상태가 점점 나빠지고 있어 아버지에게는 불안이 엄습한다. 돌이켜보면 이 불안은 한빛의 삶의 시간을 첫돌, 5년, 8년, 그리고 13년이라고 마치 칼로 자르듯이 정해주던 의사의 말에 닿는다. 정말 그 말대로 지금이 끝인가. 아버지는 속이 탄다.
중증 장애를 앓는 아들에게 병을 고쳐주고 싶고, 교육도 제대로 해주고 싶다. 하지만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무기력해지고 자책감에 빠진다. 그러나 한빛이와 아버지는 다 털어내고 웃기로 했다. 나뭇잎이 바람에 날려도 웃고, 계단을 헛디뎌도 웃고, 경기하고 쓰러져 정신을 놓고 있다 일어나면서도 웃는다. 웃고 살기에도 삶은 짧고 부족하기 때문이다.

함께 어울려 살아가기

한빛이 아버지는 장애인도 차별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 사회 속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것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사람들이 장애를 바라보는 인식의 변화다. 장애인은 그저 부족한 사람, 혹은 모자란 사람으로 여긴다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장애인과 사람의 관계가 아닌,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만들고 우리 생활 속에 그러한 인식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함께 어울려 살아가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장애는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장애인신문, 복지뉴스, welfare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