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은 여자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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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319회
작성일 09-12-22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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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그녀의 손과 점자책 위로 겹쳐진 가정교사의 손. 묘한 감정을 느끼는 그녀의 손을 살며시 놓고는 당황해하며 창가로 향하는 가정교사. 그 순간 스크린 속에서 나지막하게 흐르는 그녀의 내레이션.
빼앗겨버린 여성성
헬렌켈러의 이야기를 각색한 인도 영화 ‘블랙’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만약 이 장면이 영화 속이 아니라 현실이라면, 그리고 그 두 주인공이 사제지간이 아니라면 어떠했을까? 현실 속의 여주인공도 사랑이라는 묘한 감정을 가지면 자신이 세상에 던져져야 하는 물음표가 많아지기 때문에 두려울지 모른다. 이는 외모지향주의 우리사회가 만들어 놓은 여성상 때문이다. 사회가 정해둔 여성미의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추녀로 몰려 모욕을 당하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그래도 추녀들에게서 여성성을 빼앗지는 않지만,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장애여성들에게는 사회가 그것마저 빼앗는다. 그래서 장애여성들은 여성도 남성도 아닌 무성적인 존재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특히 장애가 심하면 심할수록 더 그렇다.
내가 여자라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은 남자아이처럼 짧은 머리에 늘 바지만 입고 다녔던 초등학생이 중학생이 되어, 긴 머리에 치마를 입고 다니는 선배들이 부러워 보일 때부터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사춘기가 내 예민한 감성을 깨웠다.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내게 단정한 짧은 머리와 바지만을 강요하던 엄마의 시선을 피해 나는 학교 기숙사에서 머리를 기르고 치마를 입고 학교를 다녔다. 외모가 여자아이로 변하니 마음도 변해버렸는지, 여려지고 빈 곳이 생긴 마음속으로 사랑이 살금살금 찾아들었다.
사랑, 허락되지 않은 감정
얌전히 뛰고 있는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 그 아이를 만난 건 학교 밑 구멍가게 앞에서였다. 그날도 기숙사에서 저녁을 먹고서 나무가 많은 공터에 산책하러 가기 위해 혼자서 전동휠체어를 천천히 운전하며 구멍가게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헐렁해서 평소에도 잘 벗겨지던 신발이 벗겨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전동휠체어에서 신발을 주우려고 허리를 굽혀 흔들리는 손을 바닥을 향해 뻗어봤지만 신발이 내 손에 들어오지 않아 넋을 놓은 채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을 신발만 바라보고 있는데 교복을 입은 한 남자아이가 내 앞에 오더니 신발을 주워 전동휠체어 발판위에 올려주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 그 아이를 자세히 보니 목을 가누는 것이 약간 부자유스러웠으며, 검은 안경을 낀 그 아이의 하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신발을 주워주며 환하게 웃는 그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내 얼굴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홍당무가 되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그 아이가 친구하자는 제의를 했고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알고 보니 그 아이도 나처럼 뇌성마비 장애인이었고 나랑 동갑에다 우리 학교 옆 일반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우리는 구멍가게 앞에서 가끔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사이가 되었지만, 나는 그 아이를 남자로서 가슴속에 늘 품고 있었다.
혼자 있을 때 그 아이를 떠올리는 시간이 늘어나고 그 아이를 생각하면 가끔씩 왠지 모르게 가슴 한 귀퉁이가 살며시 저며들었다. 그래서 발렌타인데이를 기회삼아 용기를 내, 초콜릿에 내 마음을 담아 그 아이에게 주면서 조심조심 고백을 했다. 그러나 돌아온 그 아이의 대답은 내가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는 퉁명스러운 한마디 말뿐이었다. 그 이후 우리는 자연스레 멀어져갔다. 그리고 그 상처로 인해 호감 가는 이성을 만나도 혼자서 좋은 감정을 삭여야 할 뿐, 그 감정을 상대에게 드러낼 수 없게 되었다.
산타클로스가 온다면
나는 사춘기를 겪으면서 내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여성성을 발견했지만 그와 동시에 내가 지닌 여성성을 세상이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우리사회에는 살아가면서 자신의 성정체성을 포기해야만 하는 나와 같은 장애여성들이 많다. 이는 사회가 정해 놓은, 여성의 이미지에 대한 획일적 통념 때문이 아닐까. 그 통념 속에서 여성의 이미지는 최소한, 몸이 정상적으로 움직이며 곡선으로 흐르는 바디라인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휘어지거나 비틀어진 장애여성들의 몸은 통념적 여성의 이미지와는 상반되기 때문에 사회는 그녀들을 무성적인 존재로 여긴다. 사회가 겉모습만으로 그녀들의 성적인 권리를 빼앗는다면, 그녀들은 자신의 성을 숨기며 누릴 수 있는 행복한 삶도 놓쳐버릴 것이다.
이제 크리스마스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녀들이 빼앗긴 성정체성을 산타클로스가 찾아서 가져다주는 상상을 해본다. 하지만 상상은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 그 누구도 삶을 대신해서 살아줄 수 없듯 그녀들의 힘으로 자신의 여성성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사회로부터 인정받는 아름다운 여성들이 되지 않겠는가.
*칼럼니스트 지미희는 뇌병변 장애여성으로서 사회의 통념을 깨고자 느리지만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글쓰기를 통해 남다른 감수성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그것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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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지미희 (dwnetwor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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