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의 어려움을 들어주는 장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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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09-05-19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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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저는 현재의 우리 아이를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차라리 듣지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그런 시간 속에 살다 아이를 낳고 싶었고, 남편은 남편대로 고통과 아픔을 견디려는 그녀의 입술을 보곤 정말로 생각지 말아야 할 인생의 마지막을 세식구가 함께 결심을 하자고 하였지만 뱃속의 아이를 생각하곤 한없이 미안해하고 함께 울던 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때의 아픔은 현재로써도 감내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장애인들과 함께. ⓒ이복남
그 후 그녀는 민간요법을 통해 수없이 치료를 받았고 60여일 후 아이는 정상으로 태어났다. 그 때 태어난 아들 수용이가 지금은 대학도 마치고 직장에 다니는 아들이 되어 얼마 전에는 예비 며느리도 집에 데리고 오는 든든한 아들로 장성하였다.
아이도 성장한 이후에야 교통사고 전문 병원에 입원하여 9번이라는 대수술을 했다. 한 번 두 번 수술을 할 때 마다 그녀의 다리가 조금씩 낳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 “하나님 꼭 낳아서 우리 돌쇠와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 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수술대 위에 누울 때마다 천정의 불빛들을 바라보며 두려움과 투쟁하며 남들이 하던 대로 조그만 두 손을 꼭 잡고는 기도도 해보았다.
그러나 아이 때문에 지나 온 시간이 너무 길었던 탓인지 결국 8번째 수술대에서 무릎을 절단해야 했다. 그 후부터 20cm도 훨씬 넘게 짧아진 다리의 장애를 가지고 이 세상에 살아갈 수 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 내 다리는 짧아, 이렇게 살 수 밖에 없어.” 수용이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에도 짧아진 다리를 보면서 세상과 등진 채 어두운 방에서만 살았다.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죽음까지 생각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다리의 상처들은 엉망이 되고, 약을 제대로 먹지 않아 온 방이 쓰레기 하치장을 옮겨 놓은 듯 한 모양새에 참다못한 돌쇠가 반 강제로 그녀를 끌고 나왔다. 돌쇠는 그동안 수술하고 치료했던 병원으로 데려 갔는데 병원 앞에서 그녀와 함께 병원에 입원해 있던 환자 중 그녀를 보고 이모라고 불러주던 젊은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무릎 위 하반신 양쪽 대퇴를 절단한 친구였었는데 그런 몸으로 형수와 국수 장사를 하고 있다면서 그 친구는 환하게 웃었다. 그 친구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녀는 너무나 부끄러워 하늘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젊은 나이에 장애를 입고도 저렇게 해맑게 사는데 나는 세상에 가장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이 있는데도 이게 뭐람. 그때부터 세상을 다시 보고 살아가는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 계획하자고 두 손을 꽉 쥐며 다짐을 했다.
그 때부터는 사는 게 겁나지 않았다. 건설업을 하는 남편의 사업실패로 어려움도 있었지만 가족이 힘을 합쳐 조금씩 극복해가고 있다. 2007년 초 부산진구에 있는 모 장애인 사무실에서 식사 봉사자로 나가게 되었다. 장애인 사무실에서 청소를 하고 식사준비를 하다보면 몸이 불편하신 분들이 많은데 나이에 관계없이 조금 덜 불편한 사람이 더 불편한 사람을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손수 먼저 챙겨주는 모습에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함 그대로 인 것 같아 너무 좋았다.
한때나마 나의 장애가 세상에서 제일 크고 도저히 이 몸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생각을 했던 자신이 정말 부끄럽고 이 분들의 얼굴조차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많은 시간들은 아니었지만 정말 열심히 최선을 다해 함께 하기시작 했고 돌쇠도 이런 그녀를 이해하여 차량이 필요할 때면 소유하고 있는 9인승 봉고차량과 함께 봉사하여 주는 수고로움이 고마웠다.
그녀가 봉사하는 장애인 중에 49세 된 오른쪽 무릎 아래 절단 장애인이 있는데 아직 결혼을 못하고 있어 그 이유를 물어 본 노랫가락으로 대답하였다.
“우리 마누라는 돈 벌로 간다고 오징어 배타고 일본 갔는데 아직도 오질 않네, 언제나 올런가?” 결혼 못한 걸 알고 사기꾼들이 접근하여 돈 150만원 만 주면 예쁜 아가씨와 결혼 시켜 준다기에 선뜻 주었더니 결혼식만 하고는 그 것으로 끝이라는 것이다. 장애를 입은 동기들을 풀어 놓을 때면 울기도하고 웃기도 하면서 정말 기막힌 사연들을 접할 때는 지나왔던 그 고통의 시간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고 생각하면 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영천군 화북면 오산리 월지의 팔공주 집에서 어렵게 자랐고, 이제는 장애까지 입어 그의 곁에는 남편과 아들 하나 밖에 없다. 그래도 오늘은 장애인들을 위해 그들의 얘기를 들어주고, 뭔가를 대변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진태자씨 이야기 끝.
* 이 내용은 문화저널21(www.mhj21.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복남 기자 (gktkr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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