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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그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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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회 925회 작성일 10-12-21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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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씨를 뿌리지 않았는데도, 또 가꾸지 않았는데도 해마다 그 자리에 돋아나고 그 자리에서 열매를 맺는 게 대자연의 이치다.

밤이며, 도토리며, 머루며, 달래며, 으름이며 이 모든 산열매들은 대자연의 품속에서 대자연에 순응하며 스스로 꽃을 피워 열린 것이다.

더우기 내고향 뒷동산의 청아한 산새소리에 눈 뜨고, 졸졸졸 흐르는 실계곡 물소리에 꽃 피우고, 하늬바람 소리에 알알이 영글었을 그 산열매의 싱그러운 맛을 나는 고향 떠난 지 수 십 년이 지난 지금도 혀끝에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늦가을 산이 베프는 선물 가운데 주옥이라 할 수 있는 산밤은 알은 잘아도 맛은 그만이다. 아침 일찌거니 산에 올라 뒷산 밤나무 밑을 훑어보면 밤새 떨어진 알밤이, 몽돌해안의 몽돌만큼이나 즐비하게 깔려있는데, 잠깐만 주워도 바지 주머니가 불룩, 저고리 주머니가 불록 있을만큼 내고향의 깊은 가을산은 언제나 넉넉한 선물을 준비하고 사람의 손길을 기다렸다.

그래도 이게 양이 차지 않아서 더 욕심껏 주워보겠다고 밤나무 아랫배를 발로 냅다 찬 다음에 저만큼 물러서 있어도 밤송이는 머리꼭지를 정통으로 겨냥해 가시주먹을 날리는 거다.

그뿐인가? 아직 벌어지지 않은 밤송이를 장대로 후려쳐서 떨어지면 그걸 현장에서 까는데 고무신을 신은 발로 밤송이 한쪽을 지긋이 밟고는 막대기나, 낫 끄트머리로 꾹꾹눌러가면서 애를 쓰다보면 너무 세게 눌러서 밤송이가 위로 툭 튀어 올랐다가 양말도 안 신은 맨발 위로 뚝 떨어지기라도 하면 성글성글한 그 밤송이 가시에 맨살을 찔려 발등을 두 손으로 움켜잡고 한발로 서서 겅중거릴 수밖에 없던 일까지도 다시 머무르고 싶은 순간들이다.

그 밤송이를 까면 대개가 의좋은 3 형제 밤이 들어 있지만, 더러는 하나뿐인 통밤도 들어 있고, 어떤 건 두 놈이 짝을 지어 쌍둥이로 들어 있다.

“쌍둥이 밤은 혼자 먹으면 못쓴다. 동생하고 나눠 먹어야지. 쌍둥이 밤을 혼자 먹으면 훗날 장가가서 쌍둥이를 낳는다더라.”

쌍둥이 밤에 깃들어 있는 이 금기 사항은 무슨 뜻일까? 우리 옛 사람들은 서로 나눠 먹고 베플면서 살아야 한다는 미덕을 그런 식으로 가르쳤던 건 아닐까.

다음으로 꿀밤이라고도 부르던 도토리는 다람쥐의 주식이자 그들의 보관용 겨울 양식이다. 요즘엔 배불리 살만하고, 고급스러워진 입맛 때문에 대접이 다르긴 하겠지만, 지난날 가을철이면 부녀자들은 도토리를 몇 섬씩 주워다 겨우내 도토리묵이나 도토리범벅을 만들어 먹었다.

싸락눈이 창호지문을 후두두 두들기는 겨울밤에 화롯가에 둘러앉아 묻혀 먹던 그 도토리묵은 깊어가는 겨울밤의 정취를 한껏 돋우어 주던 야참 중의 일등공신이었다.

다음으로 빼놓을 수 없는 산열매는 다래다. 요즘 우리가 흔히 먹고 있는 외국산 키위의 사촌격이라 할 수 있는 다래는 동아줄 같은 줄기가 얼기설기 엉키면서 큰 덤불을 이루고 있던 그 밑에는 애들 주먹만한 다래가 익어서 주렁주렁 매달려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데, 처녀들이 이 다래를 따러 다니노라면 조그마한 소동이 곧잘 벌어 졌었다.

다래 덩굴밑에서 세상모르게 낮잠을 즐기고 있던 노루란 녀석이 예기치 못했던 불청객한테 깜짝놀라 후다닥 뛰어 일어나는 바람에 처녀들의 간이 많이 떨어지기도 했던 그 다래.

다래넝쿨을 잘라서 다듬어진 싸리가지로 속을 밀어내고 종이를 씹어 넣고 쏘아대며 놀던 딱총놀이도 잊지 못할 옛날이다.

마지막으로 으름도 빠트리면 섭섭해 할 가을 산의 귀한 선물이다. 통통하면서 길쭉한 생김새도 그렇고 속살의 촉감이나 맛 또한 영락없는 바나나다. 다른게 하나 있다면 으름에는 수박씨같은 새카만 씨가 듬성듬성 박혀 있다는 것과, 익으면 껍질이 두 쪽으로 쩍 벌어진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그 맛이 워낙 좋다보니까 열매가 열리기가 바쁘게 서로 소유권을 주장하느라 티격태격이었던 거다.

“요건 내 꺼다.”

“아냐. 내가 먼저 침묻혀 놨어?”

이렇게 너도 나도 가계약을 해놓고는 하루는 이 녀석이 가서 만져보고 또 하루는 저 녀석이 가서 만져보고, 허구한 날 이놈 저놈이 주물럭주물럭 하다보니 그 으름은 몸살을 앓을 수밖에….

아무튼 아이들의 이런 기대감 쏙에서 그 으름은 한 뼘 길이로 자라나고, 가을이 제법 깊어지면 껍질이 쩍 벌어지면서 몰랑한 속살을 드러내는데, 아이들이 바로 요때다 싶어 찾아가면 그 풀숲에선 산비들기란 녀석이 푸드득 날아오르기가 십상이다. 그것은 아이들보다 더 먼저 군침을 삼키며 익을때를 기다려온 산비들기란 녀석에게 선수를 빼앗겼다는 의미다.

그렇다. 가을이면 그 많은 선물들을 내어주고도 이내 잊어버리고 또 내년의 선물을 약속하는 품 넓은 산이 있고, 그 산의 주인은 있어도 임자가 따로 없는 그 산열매들을 동물들과 함께 나누며 온몸으로 가을을 마시던 그때를 나는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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