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밤과 미니 수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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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0-11-30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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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꿀맛인데요.”
내장산 단풍이 절정을 이룬다는 휴일을 맞아 나는 한국산악회 전북지부 회원들과 함께 모악산 둘레길(전주-금산사 구간)을 다녀오게 되었다.
전주와 김제경계지역을 걸어갈 무렵 점심때가 되어 우리는 논 한가운데에 있는 모종 마루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각자 준비해온 도시락을 꺼냈다. 아쉬운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송 관장, 주먹밥 참 맛있겠는데?”
“어서 들어 봐. 안사람이 양을 참 푸짐하게도 준비했네, 그려.”
나는 아내가 새벽부터 정성들여 준비해 준 버섯주먹밥과 삶은 밤과 삶은 계란을 도시락 뚜껑에 담아 앞으로 내놓았다.
“송 관장 자, 농주 한 잔 받아.”
“좋지. 근데 이 막걸리는 어디서 났어?”
“인근 마을에서 사왔지.”
막걸리가 한 배주씩 돌았다.
“캬아! 술 맛 좋구나. 이게 사람 사는 맛 아니겠어?”
나는 술안주로 삶은 밤을 하나 들어 이빨로 반으로 쪼갰다. 꿀맛처럼 달콤한 밤 속을 혀와 이빨로 요령껏 갉아 먹으려 했는데 어째 먹은 것보다 껍질 채 버린 게 더 많았다. 그때 갑자기 민주화 운동으로 장기간 옥고를 치루었던 지인이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났다.
“개천절이라 아침으로 보리밥 대신 흰쌀밥이 나오고 점심에는 삶은 밤 몇 알이 특식으로 나왔지. 나는 출출할 때 먹으려고 남겨놨다가 먼저 앞니를 사용하여 대충 갉아먹은 다음 숟가락으로 마저 퍼 먹었지.”
“알밤이 얼마나 크길래 수저로 퍼 먹어요?”
“보통 수저로는 잘 안 되고 조그만 수저로 퍼 먹었다네.”
“작은 수저는 어디서 났는데요?”
“8·15 광복절 때 특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나누어 주었을 때 함께 받은 수저인데 그때 버리지 않고 보관해 두었거든.”
“그랬군요.”
“교도소에서는 모든 물자가 귀하다네. 이런 작은 수저에서부터 먹고 남은 빈 컵라면 용기까지 모두 버리지 않고 두었다가 여러 가지 용도로 쓰곤 하지.”
“그럼 다 먹은 아이스크림통도 활용을 했었겠군요?”
“그건 깨끗이 씻어서 양념통으로 썼지.”
“그런 물건들은 어디다 보관해둬요?”
“독방이 한 평 정도 되는데 반 평은 잠자리로 사용하고 남은 반 평으로 책상과 물품보관 공간으로 사용하지.”
그는 어려서부터 집안 어른들이 물건 하나 함부로 버리지 않는 것을 보고 자라서인지, 아무리 하잘 것 없는 물건이라도 함부로 버리질 못하겠다고 했다.
“요즘 젊은이들이 양말이나 팬티를 세탁하기 귀찮아서 몇 번 입고 버리는 것을 보면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아. 교도소에서 물건 버리는 것을 보면 겁이 날 정도야. 밥 버리는 것도 그렇고 말이야. 자원을 이렇게 함부로 낭비하면서 이 생태계와 자원이 과연 온전하게 유지될까 생각하면 고개가 절로 흔들어진다구.”
“예, 저도 동감입니다.”
“아, 아까 밤 까먹는 얘기 하다가 엉뚱한 얘기로 빠지고 말았네. 교도소에서 밤은 어쩌다 먹어 보는 귀한 것이라서 행여 밤 부스러기가 바닥에 떨어질까 사뭇 조심하면서 작은 수저로 긁어 먹었지.”
“밤 맛이 무척 좋았겠어요.”
“그럼, 밥 먹기 전이라 출출해서 그런지 밤이 입 안에서 살살 녹는 게 맛이 기가 막혔지. 언뜻 보기에는 다 먹은 것 같아도 수저로 구석구석 긁어 보면 밤이 마치 대팻밥처럼 꽤 나오거든.
“하하, 그랬군요.”
“알뜰하게 긁어 먹고는 물을 한잔 마시며 아쉬운 입맛을 다시곤 했지.”
그러고 보면 맛이란 것은 음식 자체에서라기보다 허기와 정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적당히 배가 고프고, 음식을 만드는 정성과 먹는 정성이 합쳐지면 어떤 음식이라도 맛이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왜 그리 밥을 먹기 싫어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간다. 먹을 것이 귀한 줄도 모르고 마음이 닫혀 있으면 맛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법이다.
“이 선생, 혹시 작은 티스푼 있는가?”
“어디다 쓰려고?”
“응, 삶은 밤을 박박 긁어 먹으려구.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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