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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 아빠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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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회 997회 작성일 10-09-10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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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으로서 아빠가 되는 일은 장애인에게만 적용되는 무임승차권이나 구매 할인 쿠폰이 있을 경우 마치 그것을 복지카드 내밀고 무료로 사는 것과 같은 심정이다.

'아빠'라는 지위가 귀속지위이니 망정이지, 애써 노력하여 치열한 경쟁을 통과해야만 얻을 수 있는 성취지위라면 과연 나 같은 1급 시각장애인에게도 그런 '아빠'라는 지위가 주어지겠는가.

나는 27살과 25살짜리 아들을 두고 있다. 우리 집도 여느 가정처럼 아이들 교육과 뒷바라지는 집에서 살림하는 아내의 몫이고 그저 남편은 가장으로서 상징적 존재일 뿐이다.

정안인(비시각장애인) 가정의 아빠들은 그나마 퇴근해서 아이들과 동작성 놀이를 자주 주도한다든가 휴일이면 야외로 아이들을 데리고 다닌다든가 하면서 아빠의 존재가치를 공고히 하는데 적어도 아이들 입장에서 보는 시각장애인 아빠의 위치는 그저 이름만 아빠일 뿐이며 직무 태만한 아빠이다.

큰 아이가 세 살 때의 일인 것 같다.그 당시 우리 집은 아파트로 2층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오전 오후로 햇빛이 잘 들어왔다.

작은방에서 책정리를 하고 있는 내게 와서 큰아이는 내가 하는 일을 지켜보더니 "아빠, 이거 뭐야?" 라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그저 지나가는 물음이니 하며 생각없이 "응 , 뭔데?" 하며 하던 일을 계속했다. 큰아이는 아빠의 답변이 불만족스러운 듯 조금 언성을 높여 "아빠, 이게 뭐냐고?" 하며 내 손을 자꾸 가져 가려했다.

나는 그제서야 상황 파악을 위해 "응, 민아 뭐 말인데?" 하며 큰아이가 이끄는 대로 책장이 있는 쪽으로 갔다. 그리고 내 내 손이 멈춰진 곳은 책장 안에 빼곡이 꽂힌 책이었다.

"응, 이건 책꽂이야. 그리고 이건 아빠 책이야" 라고 친절히 가르쳐 주었다. 그러자 큰아이는 막무가내로 발을 동동 구르며 ‘아빠, 그거말고 이거’ 라고 소리쳤다.

나는 조금 당황하면서 다시 한번 큰아이에게 정중히 물었다. "어떤 것 말이니? 민아 아빠 손을 잡고 다시 물어 봐." 그러자 울기 직전의 상태인 큰아이는 포기 하지 않고 다시 내 손을 잡고 책꽂이 위의 책에 손을 갖다 놓았다.

나는 '설마 이 아이가 책과 책꽂이를 모를 리가 만무한데'라고 의아하게 생각하며 더 자세히 "응, 이거 이것은 책이란다. 그리고 이 큰 나무 상자는 책꽂이라고 해. 책을 가지런히 정리해 두는 곳이지" 라고 대답했다.

나의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큰아이는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아빠의 성의도 무시한 채 막무가내로 울기만 하는 큰아이를 안고 큰방으로 가 엄마한테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고는 다시 하던 일을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울음을 그친 큰아이가 엄마를 대동하고 나타나서 나한테 물었던 질문을 똑같이 엄마한테 물었다.

엄마는 큰아이가 가리키는 손의 방향을 유심히 살피더니 "응, 그건 햇살이라고 해. 밖에서 햇님이 창문을 통해 들어온 거야" 하며 엄마는 낄낄 웃었다. 나는 그제서야 큰아이가 가리키는 대상을 파악하고 허탈했다.

이번엔 둘째 녀석이 세 살 때의 일인 것 같다. 여름 휴가 무렵으로 생각되니 아마도 8월 초순쯤인 듯 싶다. 어디를 가려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우리 가족은 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정류장 쪽으로 걸어 가고 있었다.

햇살이 무덥게 폭폭 내리쬐고 있었다. 한 손엔 부채를 들고 한 손엔 둘째아이의 손을 잡고 가던 중 둘째놈이 길을 가다 말고 자꾸 발을 길바닥에서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이었다. 그 때 마침 엄마는 큰아이와 앞서가고 있는 터라 이런 아들의 행동을 보지 못했다.

나는 "원아, 왜 그래 얼른 가야지 엄마랑 형은 앞에 가는데?" 하며 길을 재촉했다. 그런데도 둘째아이는 징징대며 자꾸 발에 무엇이라도 묻은 양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하고 징검다리를 건너는 양 재빨리 발을 내딛으면서 더욱 큰 소리로 징징대고 있었다.

나는 얼른 앞서가는 아내를 불러 세우고 상황 파악을 위해 둘째아이의 행동과 문제 해결을 위해 아내에게 인솔권을 넘겼다.

아내는 둘째아이의 그런 행동을 보더니만 낄낄낄 웃으며 "원아, 그건 그림자야. 햇님이 너를 비춰서 생기는 거니까 네가 도망가도 너를 따라다니는 거야" 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둘째 아이는 그림자가 무서운데 자꾸 자기를 따라 다니니까 그것을 떼려고 했던 것이다. 가볍게 웃어 넘길 수 있는 에피소드 두 토막의 이야기는 시각장애인 아빠로서는 상당한 자괴감을 줄 수 있는 사건이다.

여느 다른 보통의 아버지로서 평범하게 직장 생활을 바쁘게 하다보니 어절 수 없이 자녀들의 교육과 뒷바라지에 소홀해지는 그런 일반적인 자괴감이 아니라 시각장애인이기 때문에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쉽게 수행하지 못한다는 그런 자괴감 말이다.

그렇다고 이런 자괴감에 심취해서 아버지의 역할을 더욱 태만히 한다면 그건 또 아버지의 지위를 포기하는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시각장애인 아빠지만 할 수 있는 가능한 역할을 수행하여 아버지의 존재 가치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는 그런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나는 아이들이 아플 때 아이들의 건강 살피는 일, 영어 회화책을 점자로 옮겨 적어서 아이들과 함께 읽어 보는 일, 컴퓨터 음악을 통해 신나는 노래를 따라 부르게 하는 일명 가족 노래방을 꾸며 주는 일, 진로문제를 상의 하는 일 등등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아마도 이제 아이들은 이전 아빠의 허상적 존재 가치에서 실질적 존재 가치로 재평가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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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송경태 (skt2211@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