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놀리던 아이가 장애인이 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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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0-08-11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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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쯤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가 안쓰러운 일이 생겼다며 전해준 소식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나는, 다른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오직 ‘명선’이라는 이름뿐이었다.
‘그래? 그 녀석은 그런 일을 한번 당해봐야 해. 오히려 잘 된 거네.’
배고픈 아이에게 “밥 줄까?” 라고 얘기해도 그렇게 빨리 반응이 나올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대답을 했던 것 같다. 내 말을 들은 어머니는 “얘가 왜 그렇게 성격이 날이 섰느냐”고 한 마디 하셨지만, 깊은 상처의 흔적만 보아도 상처를 입었을 때의 순간이 떠오르는 것처럼, 나 역시 그 녀석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들을 갖고 있었다. 그는 학창시절 내가 왕따를 당할 당시 주범이었기 때문이다.
멱살접이는 예사, 기억하기도 싫었던 수학여행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도 그 녀석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는 나를 괴롭혔던 아이들과 선생님의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했었다. 당시 반에서 공부 좀 한다는 측에 들었던 녀석은, 나를 놀리는 아이들과 친했었고, 다른 아이들이 나를 놀리더라도, 그렇게 해서 혹시 담임 선생님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그런 일 없다”라고 말하면 그걸로 상황은 종료되었기에, 담임을 맡고 있던 선생님이 내가 어느 정도로 왕따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지 모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배경을 등에 업고 나에 대한 왕따는 하루하루 정도를 더해갔다. 맨 앞자리에 앉았던 내 등에는 뒷자리 아이들이 쏘아대는 고무줄 때문에 내 등은 편할 날이 없었고, 그에 대해 반항이라도 할라치면 어김없이 명선이의 멱살잡이가 이어졌다. 조용히 있으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따돌림의 하이라이트는 수학여행 때였다. 80~90년대 학창시절을 보낸 이들은 누구나 그렇겠지만, 우리들의 수학여행지 역시 경주였다. 모두가 들뜬 기분으로 버스에 올랐고, 나 역시 지금만큼은 왕따로부터 자유롭겠지 싶었다. 아이들과의 어울림은 남의 일이었고, 그저 괴롭히지만 않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이 짧았음을 후회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고속도로를 달리던 버스 창가에 터널이 보이기 시작하자, 아이들 몇몇이 은근한 눈짓을 주고받더니 터널에 진입하기 시작하자 집단 구타가 시작되었다. 한여름에 내리는 게릴라성 집중호우처럼, 아이들의 구타 시간은 짧았지만, 마음의 상처는 컸다. 이후 터널로 지나갈 때마다 같은 일이 반복되었기에, 편히 쉬려는 계획 역시 물 건너간 셈이다. 그때 몸이 지쳐서인지, 나를 보살펴주던 아이들은 평소보다 더 힘들어했고, 그때 나를 보살펴주었던 아이들에게는 지금도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렇게 어머니에게 과거를 이야기하자, 어머니 역시 묵은 이야기를 꺼냈다. 초등학교 때도 나와 같은 학교였던 그는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나와 곧잘 어울리기도 했는데, 그 당시 명선이 어머니가 내 어머니에게 “명선이가 현석이랑 어울리면 성적이 떨어지니 어울리지 말라”고 말을 해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건강했던 아들이 장애를 입어서였을까? 명선이 어머니는 그때, 내 어머니에게 “내가 옛날에 모진 말을 했는데, 그 말이 참 마음에 걸리더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명선이에게 내 이야기를 하면서 그 때 일을 기억하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했단다.
그는 지금 내게 과거에 했던 일에 대해 미안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를 용서하고 싶은 마음도 그렇게 할 생각도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말해두고 싶다. 앞으로의 삶은 그 이전보다 훨씬 더 힘이 들 테니 한번 세상을 겪어보라고.
*이 글은 현재 경기도 광명시에서 살고 있는 독자인 정현석님이 보내왔습니다. 에이블뉴스는 언제나 독자 여러분들의 기고를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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