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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장애인이 아닌 당당한 시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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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회 1,312회 작성일 09-12-21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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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수년이 넘는 시간동안 시설에서 살아왔던 장애인 3인이 사회복지서비스를 수혜자로 시설보호가 아닌 지역사회 자립을 위한 서비스를 받기 위해 지자체에 서비스변경신청을 했다.

다음은 충북 음성 꽃동네 '희망의 집'에서 생활하고 있는 윤국진·박현 씨와 '향유의 집' 황인현 씨가 시설에서의 삶과 자립을 위한 요구를 기술해 신청서와 함께 제출한 편지의 원문이다.

"간단한 거지만 자기 맘대로, 하고 싶은 거 하며 자유롭게 사는거 시설에서는 못해요"

황인현 / 김포 향유의집(구 석암베데스다요양원)

추재엽 양천구청장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서울시 양천구청 관할의 사회복지재단 프리웰(구 석암재단)의 산하시설인 향유의집(구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서 18년간을 생활하고 있는 황인현입니다. 저는 40세 지체장애 1급의 남성입니다.

태어날 때는 장애가 없었어요. 근데 자다가 경기를 했데요. 그걸 그냥 놔둬야하는데, 엄마가 애가 경기를 하니까 병원에 데리고 갔데요. 그때 내가 놀래가지고 이렇게 됐데요. 이후에 병원에 갔더니 앞으로 내가 걷지도 못하고 누워서만 생활한데요. 정말 집에서 매일 텔레비전만 보고, 음악만 듣고 그랬어요. 형제들은 다 학교 다니고 사회활동을 해서 같이 못 놀았어요. 매일 나가고는 싶었지만 나갈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 삼육재활원에 갔더니 엄마한테 나 운동시키라고, 물리치료도 받으면 좋아진다고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출퇴근 했어요. 매일 엄마가 업고 재활원까지 갔는데, 버스가 안 태워주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차도 잘 잡지 못했고, 엄마도 고생을 많이 했어요. 그래도 나는 좋았어요. 집에만 있다가 나가니까, 세상 구경하는 게 아주 좋았죠. 내가 할 수 있는 게 거기 다 있잖아요.

삼육재활원에서 6개월 있었는데, 근데 나이가 차니까 딴 데 가라고 통보가 왔어요. 거기는 18살 먹으면 나가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해서 병원에 들어가려고 했더니 돈이 두배 더라고요. 해서 나는 못 간다고 했더니 돈을 더 내고 기숙사에 가라고 하더라고요. 기숙사에 갔더니 이 돈을 가지고 못산데. 해서 집에서 돈이 없으니까 나와서 딴 데 가자고 했어요. 결국 돈이 없어서 더 있을 수가 없었지요. 재활원에서는 휠체어 타고 내 마음대로 왔다갔다 했는데, 집에 오니 다시 갇혀 지내야 했죠. 친구도 없고. 그때는 화장실도 집 밖에 있어서 그것도 힘들고. 엄마가 매일 대변처리를 해주셔야했고. 기분이 착잡했죠, 많이 우울했고. 그래서 다시 보내달라고 많이 울었어요.

3년 뒤 더 이상 집에서 돌볼 사람도 없고, 경제적 형편 때문에 제 의사와는 무관하게 큰형과 가족들에 의해 지금의 향유의집(구 석암베데스다요양원)으로 왔어요. 올 때 죽을 때까지 있는 비용으로 생각하고 생활비 3천만원을 냈어요. 21살부터 지금까지 18년 동안 있어요. 지내오는 동안 비리가 있다는 눈치는 채고 있었는데, 아무도 말을 못하고 지낸 거였어요. 정부에서 피복비를 지원해주는데 우리 옷을 매번 나일론으로 된 싼 것만 사는 거예요, 그것도 체육복으로. 봄·여름·가을·겨울 다 마찬가지였죠. 또 간식비를 챙긴다고 생각했죠. 예전엔 우유가 매일 나왔는데, 나오다가 안 나오고, 빵도 안 나오고 그러더니 감자랑 고구마만 간식이라고 주는 거예요. 또 야유회도 반도 안 데리고 가는 거예요. 야유회 비용으로 나온 돈도 챙겨야하니까. 그렇게 계속 돈을 챙겨서 땅만 사고, 건물만 짓는 거예요. 그래야 새로운 사람 데리고 와서 수용시킬 수 있으니까. 선생님들 월급도 두달 동안 밀렸다는 얘기도 있었고요. 근데 구청에서는 감사를 나와도 자기들끼리 막 하고 가는 거예요. 우리한테 뭘 물어봐야하는데, 비리가 있는데도 안 살피고 그냥 얼렁뚱땅하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들은 직원들과 함께 싸웠어요. 그래서 이부일 이사장과 제복만 원장이 처벌받게 되었어요. 올해에는 저랑 함께 생활하고 싸웠던 8명이 자립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지요. 하지만, 저랑 시설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삶은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아요. 시설의 규칙은 여전하고 먹고, 자고, 싸고 매일같이 반복되고 하는 것도 없으면서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도 없어요. 저는 기술도 배우고 싶은데 그런 프로그램이 없어요. 다 시간만 때우는 거예요. 정부에서 돈 타먹으려고요.

그것보다는 사람들은 다 바깥으로 데리고 나와서 돌아다니는 게 필요해요. 우리가 들어가서 (바깥에 나온) 얘기를 하면 자기들도 나오고 싶은데, 알고 싶고요. 자기가 먹을 수 있는 거 먹고, 보고 싶은 거 보고, 하고 싶은 거 하고 싶다고 하는 거예요. 지금 석암에서는 그렇게 하는 게 불가능해요. 선생들이 바깥에 나가는 거 잘 안 해주고, 나가서도 잘 안 따라줘요.

저는 자립할거예요. 나와서 자유롭게 살 거예요. 돈도 벌어보고. 내 꿈이 어렸을 때부터 전파상 하는 거였어요. 집에 있으면서 하도 심심해서 누워서 라디오를 세 개나 조립했어요. 뜯었다가 원위치 하고 다시 반복 그런 거죠. 처음에는 안됐는데, 몇 번 하니까 되더라고요. 그땐 완전히 날아가는 기분이었죠. 누구한테도 배운 적이 없는데 내가 그걸 해낸 거잖아요. 나도 뭔가 할 수 있어요. 근데 시설에서는 그렇게 살지 못해요. 여건이 안돼요. 간단한 거지만 자기 맘대로, 하고 싶은 거 하며 자유롭게 사는 거 시설에서는 못해요.

추재엽 구청장님.
저는 석암 같은 시설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처럼 지역사회에서 살고 싶어요. 그러려면 저와 같은 휠체어 타는 장애인이 불편하지 않게 살 수 있는 임대주택이 필요해요. 가족의 도움도 없고 기초생활수급자가 아니라 기초생활수급비와 장애수당도 받지 못해 살림살이를 살 돈도 없어요. 임대료도 낼 수 없답니다. 공부도 하고 기술을 배우려면 충분한 활동보조서비스도 받아야 합니다. 병원에도 자주 가야하고요. 힘든 일이겠지만, 열심히 기술도 배우고 노력하면 언젠가는 제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이러한 꿈을 위해 한 걸음 내딛을 수 있도록 꼭 자립생활의 기회를 만들어 주세요. 긴 편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사람처럼 인정받고 대접받으며 살고 싶어요”

윤국진 / 음성 꽃동네

박수광 음성군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음성꽃동네에서 19년간 생활하고 있는 윤국진입니다.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사람답게 사는 삶을 꿈꾸고 짧게나마 저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꼭 끝까지 읽어주시길 부탁드릴게요.

아버지 어머니 사이가 안좋아서 어머니가 집을 나가셨고, 아버지 사업이 잘 안되서 감방에 들어가있는 동안 아는 아줌마가 우리 형제를 돌봐주셨습니다. 어느날 아줌마가 저에게 “꽃동네에 아는 사람이 있으니 가보지 않겠느냐? 그리고 네가 안가면 나중에 동생들이 힘들어지지 않겠느냐?” 라고 하시더군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그때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됐거든요. 늘 집에서만 생활해야 했고, 어머니 아버지는 집에 안 계셨으니까요. 시설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애덕의 집에서 살았습니다. 꽃동네 와서 한 삼일은 밤마다 울었어요. 애덕의 집에서는 한달여 생활하다가 희망의 집에 오게 됐습니다.

시설에서 살면서 좀 지나고 적응이 되니 ‘나 같은 사람은 살기 좋구나’ 생각했었습니다. 제법 말도 잘하고, 꽃동네에 봉사 오는 사람들과도 친해지고, 직원들과도 잘 지낼 수 있었다는 것도 그랬고. 능력도 없는 내가 먹을 것 걱정 없이 생활할 수 있는 곳. 이 정도면 만족하고 살 수 있다 생각했었거든요.

그러다가 2004년도에 모 장애인단체를 통해 자립생활도 알게 되었고, 교육도 받았습니다. 여름캠프를 가게 되었는데.. 충격이었어요. 다른 장애인이 지역에서 이렇게 살고 있구나. 나는 내가 그래도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더 중한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도 지역사회에서 이렇게 잘 살 수 있는 거구나.. 내가 잘 살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시간들이 아까웠습니다. 그리고 한 켠에서 배신감도 밀려오더라고요.

아무도 나에게 시설 아닌 곳에서 살 수 있다는 걸 알려주지 않았으니까요. 아무것도 안하고, 아무것도 못한 채 10년이 넘는 세월을 이 곳에서 살아왔으니까요. 그러다 같이 꽃동네에서 살던 형이 1년 만에 시설에서 나가게 됐습니다. 내가 내고 싶지만 낼 수 없었던 그 용기가, 그 선택이 너무도 부러웠습니다.

그렇게 몇 년여 시간을 보내다가 체험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집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잠시 머무를 수 있는 곳이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시설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집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잠시가 아닌 오랜 기간 머무르며 살 수 있는 공간.. 무작정 집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쉽지 않더라고요.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최소 500만원 이상의 보증금이 필요한데 당시 통장에는 8만원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가족에게 돈을 부탁하는 방법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동생들은 그런 제가 가족에게 짐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는지 시설에서 나오는 것을 반대하였고 결국 다시 시설에 눌러앉게 되었습니다.

꽃동네에서 나온다고 생각했을 때 가장 착찹했던 건 자립생활하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 내가 책임져야하는데 과연 내가 잘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었어요. 우선 나가려면 집도 필요하고 활동보조도 필요하고, 또 돈도 필요하고.. 이 문제들이 걸리지 않았다면 더 빨리 나올 수 있었을 거 같아요. 무엇보다도 이런 상담을 어디에 해야할지 막막했어요. 돈도 없는데...

앞으로 시설에서 나와 돈을 벌고 싶어요.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능력을 활용해 컴퓨터로 할 수 있는 걸 고민해 봤어요. 요즘 컴퓨터로 할 수 있는 게 많잖아요. 마음 맞는 친구들 3~4명 정도가 함께 살면서 조그맣게 쇼핑몰 혹은 컴퓨터와 관련된 무언가를 하면 좀 더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고생은 좀 하겠지만 자리가 잡히고 나면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생각을 해봤어요.

그동안 외출도 하고, 사람들도 만나면서 장애인들이 자립생활 하는 모습을 실제로 보고 ‘내가 너무 편하게만 살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어느 자립생활 교육을 갔을 때 어떤 사람이 시설에 있는 장애인은 개 돼지라고 표현을 하더라고요. 나는 사람인데 왜 개 돼지가 되어야 하는지.. 나의 삶이 그렇게 취급되어지는 것에 대해 화가 났습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시설에서 나와 살고 싶어도 집과 돈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는 사실이 슬펐습니다.

박수광 음수군수님!!
우리도 사람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사람처럼 인정받고 대접받으며 살다가 죽고 싶습니다. 시설에서 나가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불쌍한 장애인이 아닌 당당한 시민으로 살고 싶습니다!!”

박현 / 음성 꽃동네 ‘희망의 집’

박수광 음성군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음성 꽃동네에서 생활하고 있는 27살의 박현입니다. 저는 뇌병변 1급 장애인으로 음성 꽃동네에서 생활한지 14년 정도 되었습니다. 시설안의 무의미한 생활보다는 내안의 삶을 찾고 싶어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꼭 끝까지 읽어주시길 부탁드릴게요.

시설에 오기 전까지 저는 주로 집에 누워서만 생활을 했었어요. 휠체어도 없고 해서 나간다는 건 생각도 못했지요. 꽃동네 오게 된 건 부모님 두 분 다 일을 하셔서 낮에는 동네 아주머니가 봐주시고 그러셨는데, 엄마가 너무 힘들다보니까 알아보셨나봅니다. 저는 집에만 있다가 나가는 게 좋아서 그래서 꽃동네 오는 걸 좋아했었어요. 그때는 ‘꽃동네가 시설이라는.. 이 안에서만 먹고 자야한다는 건’ 몰랐어요. 다른 사람들이 학교에 다니는 것처럼 저도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좋아했어요. 그런데 와보니 달랐습니다. 처음 꽃동네에 와서는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모든 게 낯설고.. 그래서 많이 울고.. 그렇게 지내왔습니다.

그 당시는 가족이 있으면 꽃동네에 들어오는 게 어려웠어요. 그래서 가족이 꽃동네 앞에 버리고 가는 경우도 많았지요. 저도 부모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해서 꽃동네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면회 온 ‘엄마’를 ‘이모’라고 불러야 했습니다. 참 마음이 아팠었습니다. 엄마는 1년에 두어 번 정도만 오셨어요. 자주 오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그 때보다 조금 더 자유로워졌다고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더 규제가 강해졌습니다. 일하는 사람들이 자원봉사자에서 직원으로 바뀌고 나서 오후 4시이후에는 면회도 되지 않습니다.

수없이 꽃동네를 나가 다른 친구들처럼 살고 싶었지만 엄마 속 썩이고 싶지 않고 시설에 계신 분들에게도 죄송해서 힘든 내색 않고 조용히 숨죽이고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참다가 막상 시설에서 나가고 싶다고 말했는데 모두가 반대를 했습니다. 반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막상 반대에 부딪치니 많이 서러웠습니다.

매일 똑같이 먹고 자고하는 생활을 이제는 더 이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동안은 저 같은 사람들이 나가서 살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시설에서 나와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정보를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고.. 그러나 저와 같은 뇌성마비 장애를 갖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지역에서 살면서 자유롭게 일도 하고 활동도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또 함께 생활하던 저랑 같은 장애가 있는 형이 이곳을 나가서 자립도 하고 결혼도 하는 것을 보게되었습니다. 저도 나가서 자립도 하고 공부도 하고 이성친구도 사귀고 보통 사람들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사는 형을 따라 시설에서 나가 같이 살려고 했는데 그 형이 나가지 못하게 되면서 저도 나갈 수 없게되었습니다.

집에 있을 때 한 번도 학교에 다녀본 적이 없었어요. 꽃동네에 와서 한글을 배우게 됐어요. 그때는 학교에 가고 싶긴 했는데, 아무도 갈 수 있다 이야기 해 주지 않아 갈 수가 없었죠. 갈 수 있는 곳인지도 몰랐어요. 지금은 검정고시를 통해 초등학교과정까지 마치게 되었어요. 검정고시 같은 경우도 내가 시설장한테 “저 공부 좀 배우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어봐서 준비할 수 있었어요. 당시 대학교수가 꽃동네에서 일을 해 개강 전에는 1주일에 5일, 개강 후에는 1주일에 3~4일씩 7개월 반 동안 함께 공부를 했어요. 그런데 그 교수님이 바빠지시면서 도움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혼자 준비하려니 쉽지 않더라구요. 결국 포기했죠.

14년 동안 살아온 이곳을 나가 스스로 살 생각을 하면 저 역시 걱정이 많이 됩니다. 우선 살 곳도 필요하고 활동보조도 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입니다. 가장 필요한 것은 첫째로 집인 거 같아요. 저 같은 장애가 있는 친구들 3~4명 정도가 함께 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그런 곳에서 다른 사람들처럼 살면서 못다한 공부도 하고 쉽지는 않겠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장애인 변호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같은 뇌성마비 장애가 있는 친구들을 돕는 일도 하고 싶습니다. 왜 변호사냐고요? 나처럼 시설에서만 갇혀 사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어요. 지금 저를 도와주고 있는 변호사처럼...

박수광 음성 군수님!
많이 어렵겠지만 우리의 생각과 입장을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시설에서 나와 공부도 하고 싶고, 변호사도 되고 싶습니다. 어려운 꿈이지만 저도 꿈을 갖고 살고 싶습니다. 시설장애인이 아닌 박현, 불쌍한 장애인이 아닌 당당한 시민으로 살고 싶습니다. 제가 시설에서 나가 자립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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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장경민 기자 (wildafrica@able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