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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만난 참한 아가씨 - 지체장애 3급 강명근씨 라이프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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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회 2,503회 작성일 09-03-31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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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명근씨 "먹고 살기 힘들어 보육원으로"

그렇게 혼자서 남몰래 배운 운전 실력으로 보통1종 운전면허를 따서 택시기사로 취직을 했고 다음해 입대를 해서 전주 35사단 수송부에 배치가 되었다. 군에 있을 때 한 장의 비보가 날아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데 휴가는 불가였다. 생부가 아니므로 휴가를 내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미우나 고우나 그래도 우리들을 이만큼 키워주신 분인데 아버지 초상에도 가 볼 수 없다니. 평생 호강 한 번 못해보고 고생만 하다가 돌아가신 새아버지의 죽음이 안타까웠고, 계부라고 휴가도 안 보내주는 누군가(?) 대한 미움으로 꺼이꺼이 울면서 차를 몰았다.

이래죽으나 저래 죽으나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너무 화가 나서 월남파병을 지원했고 백마부대 제7대대에 배속이 되었다.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이라 했던가. 포탄이 쏟아지는 전쟁터에서도 무사히 살아남아 1년 만에 돌아와서 36개월의 남은 임기를 홍천에서 채우고 제대를 했다.

제대 후에는 잠시 택시기사를 하다가 감전동에서 부산대학을 오가는 77번 버스를 몰았다. 75~6년쯤에 포니가 처음 나오자 포니를 한 대 사서 이른바 나가시 즉 자가용영업을 했다. 그러다가 다시 버스회사로 돌아왔는데 송도에서 주례를 오가는 61번 버스였다.

언제부터인가 아침 7시 30분쯤에 송도상고(현 부산관광고등학교) 앞에서 버스를 타고 시청 앞에서 내리는 아가씨가 눈에 띄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마주쳤는데 차츰 그 아가씨를 기다리게 되었고 어쩌다 보이지 않으면 서운했다. 당시 버스요금이 60원이었는데 그렇게 두세 달을 지켜보다가 차장(안내양)에게 그 아가씨한테는 차비를 받지 말라고 했다. “와 차비를 받지 마라 하시는데예, 아저씨 그 아가씨 좋아합니까?” 차장은 내키지 않아 했으나 아무튼 그날 이후로 그 아가씨에게 차비는 받지 않았다.

어느 날 절호의 기회가 왔다. 아침 출근길에는 자주 마주쳤으나 퇴근길에 만나기는 쉽지 않았는데 송도로 들어오는 막차에 그 아가씨가 올랐던 것이다. 아가씨가 내릴 곳이 다가오자 용기를 내어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겠느냐고 했더니 집에는 어떻게 가느냐고 걱정을 했다.

“염려 마이소. 지가 모시다 줄 끼니까.”

송도 종점에 도착해서 버스를 정차시키고 아가씨와 함께 내렸다. 밤늦은 시간이라 갈 데도 없었다. 아가씨 집이 있는 송도고개까지 걸었다. 통금시대에? 버스기사들은 운전면허증을 보이면 통과되던 시절이었다.

아가씨 이름은 정갑순(현재 55세)씨고 고향은 경남 하동인데 동생들 공부시키려고 부산 내려와서 그물공장에 다닌다고 했다. 남부민동에서 자취를 하면서 영도 남항동에 있는 공장에 다니는데 시청 앞에서 내려 영도다리를 건너간다고 했다.

참으로 예쁘고 참한 아가씨였다. 비번 날이면 아가씨와 데이트를 했고 얼마 지나 어머니에게 데려가니 어머니는 흡족해 하셨다. 그런데 하동 아가씨 집에 가니 부모님은 절대로 안 된다고 했다. 이유도 모른 체 안 된다고 하니 참으로 난감했다. 그런데 다행히도 외할머니가 그를 좋아했다. 할머니는 담배를 피우셨는데 월급을 타면 당시 제일 비싼 비둘기를 한 보루 사서 할머니를 찾아가면 손주 사위 왔다고 좋아하셨다. 외할머니가 어떻게 설득했는지 결국에는 장인 장모도 승낙을 했다.

결혼을 하고 괴정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마침 버스회사 구내식당에 자리가 나서 아내는 구내식당을 맡았다. 버스기사들끼리 술 한 잔 하면서 누구 입에서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도 소주 한 병 값 아껴서 좋은 일 좀 하자”고 했고 이구동성으로 그러자고 했다. 20여명의 기사들이 동참을 했고 한 달에 2000원씩을 각출하여 학용품과 과자 음료수 등을 마련하여 망미동에 있는 보육원을 찾았다.

지난 날 보육원에서 보낸 시절이 있어 그런지 보육원 아이들에게 애착이 갔고 기사회 활동이 5~6년 이어지자 신문과 방송에도 알려졌다. 어쩌다보니 그가 대표로 부산MBC 푸른신호등에 출연도 하게 되었다. 기사들의 자발적인 조그만 선행이 유명세(?)를 타면서 웬일인지 지난날 같은 결속력은 삐거덕거리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더구나 버스노조가 없던 시절이라 그가 회사에서 기사복지회 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기사들 복리 문제로 회사 간부들과 다툼이 일어나 버스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가 그만 두면서 아내도 기사식당을 그만 두었다. 강명근씨 이야기는 3편에 계속.

* 이 내용은 문화저널21(www.mhj21.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복남 기자 (gktkrk@naver.com), 에이블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