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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풍경,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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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회 2,371회 작성일 09-03-31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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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 대한 몇 가지

고1때 여자친구 앞에서 휠체어 리프트를 탄 기억. 대학로에서, 첫 번째 제대로 된 데이트. 리프트는 ‘즐거운 나의 집’을 배경음악으로 해서 초속 5센티미터로 움직이는 물건. 기념비적인 발명품이다.

고3때. 사당역에 엘리베이터가 없던 시기, 4호선에서 2호선을 갈아타기 위해서, 친구 4명을 경기도 구리시에서 불렀다. 미안해서 밥을 샀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지하철만큼 지루한 공간이 있을까. 심지어 지하철에서는 책을 읽는다. 복잡하고 냄새나고, 후텁지근한 지하철은 그저 하나의 공간과 다른 공간을 연결해주는 수단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것들이 내 일상이 되어 주기를 바래왔다. 그것은 언제나 하나의 풍경 같은 것.

일본의 한 비평가는 농부에게 논과 산은 풍경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것은 논과 산을 삶의 터전으로 삶지 않는 도시인들에게만 풍경이 되고 향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풍경이란 내 ‘일상’의 배경에 놓인 것. 일상에 포섭되는 순간 더 이상 그것은 풍경이 아니게 된다. 풍경은 때로 아름다운 것이지만, 풍경은 때로 잔인하다. 나에게 지하철은 20여 년간 언제나 하나의 풍경으로서만 존재할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하철을 탔다”라고 말하는 것이, 도시의 아이들이 “나 산에 올라갔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곤 했다.

익명의 공간에서, ‘이름 버리기’

2호선은 끔찍하게도 사람이 많다. 내가 가는 곳은 강남역인데, 몇 년 전 본격적으로 지하철을 타기 시작했을 무렵 처음 만난 사람은 바닥에 다리를 끌고 지나가며 구걸을 하는 한 장애인이었다. 그리고 강남역 밖으로 나갔을 때는 같은 자리에 엎드려 매일 돈바구니 앞을 지키는 장애인도 만나고 있다. 나는 복잡한 2호선 지하철 안에서 많은 사람들보다 1미터쯤 아래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고는 하는데, 그들은 내가 유일하게 아래로 내려다보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나에게 돈을 구걸한 적은 없다. 그것은 아마 그들의 자존심, 그리고 나의 자존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하철을 탈 때마다 나의 최고 목표는 바로 ‘풍경’ 속에서 어색한 존재가 되지 않는 것이다. 풍경 안으로 흡수되기 위한 소품은 책과 엠피쓰리 플레이어. 수많은 타인들. 각자 거대한 서울의 어느 구석구석에 집을 두고, 그곳에 가족을 두었을 법한 수많은 사람들이 무표정하게, 때로는 피곤하게 앉아서 졸고 있다. 의자에 앉지도, 머리 위의 손잡이를 잡기도 어정쩡한 나는 문에서 가까운 쪽에 기댄 채로 사람들을 관찰하곤 한다.

퇴근시간 쯤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는데 그때는 정말이지 휠체어가 들어갈 공간이라고는 전혀 없다. 간신히 사람들을 밀치고 탄 후 반대쪽 문으로 밀려들어가면, 매번 새로운 역에서 타는 사람들은 왜 자리가 비었는데 더 들어가지 않느냐고 사람들을 다그친다. 구석에 있는 내가 서있는 사람들 틈에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그들은 들어온 후 한마디를 던진다. “아 이 사람이 있어 그랬구만”.

계단으로 사람들이 밀려 올라간다. 그들은 ‘보통의’ 사람들. 출퇴근 시간 신도림역 같이 붐비는 곳에서 그들은 지하철을 의식적으로 타기나 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의 삶은 서로 밀고 밀리는 동안에 어느덧 계단을 오르고 지하철에 탑승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그냥 흐르는 대로 밀려서 그들의 인생은 무난히 살아지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오늘도 신도림역이 무난히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것처럼.

하지만 나는 언제나 어떤 어색함과 불편함 사이에 존재하고 있다. 수동 휠체어가 실제로 차지하는 공간은 덩치 큰 남자 한 두 사람에 불과하지만, 좁은 지하철에서 시선은 아래로 향하고 나는 엄청난 공간을 확보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줘야 할 것 같다. 계단을 오르고 사람들에게 밀려서 지하철에 타게 되고 그렇게 흘러가는 삶 따위란 없다. 중요한 것은 태연한 척하는 연기력, 안타까운 장애인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분명한 표식. 익명화된 대중적 공간인 지하철에서는 모난 존재여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물건을 파는 상인, 찬송가를 틀고 구걸을 하는 흰색의 지팡이, 좁은 지하철 안을 끼어들어오는 휠체어, 큰 소리로 수다를 떠는 노약자석의 ‘아줌마’들, 이들 모두는 이 익명의 공간에서 이름을 얻는다. 나의 목표는 바로 이 이름을 버리는 것이다.

일상성의 역설

이름을 버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몇 가지 ‘일상적인 아이템’이다. 나는 주로 책을 들거나 이어폰을 귀에 꽂는 법을 택한다. 이것은 우선 “날 제발 내버려둬요”라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이다. 휠체어를 타고 지하철을 탈 경우 겪는 경험들을 굳이 나열하자면, 옆에 앉은 친절한 중년 남성이 주는 목캔디를 받아야 한다든가, 엘리베이터에서 탄 노인이 혀를 차는 소리를 듣는 경험이라든가, 내 머리 바로 위를 가로질러 손을 잡는 연인들의 모습과 같은, 뭐 그다지 유쾌하지 않는 것들일 뿐이기 때문에, 감각을 차단하는 것만큼 편리한 일이 없다.

다음으로는 ‘나는 구걸하러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에요’라는 상징적 절차로서 책과 이어폰이 필요하다. 책은 수준 있는 것으로 고른다. 수준 있으되 지나치게 “빨간 책”은 지양하는 것이 좋다. 처세서나 부동산 관련 책들은 재미도 없고 그다지 수준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굳이 추천한다면 고전 소설 쪽이 좋다. 이렇게 되면 이름을 버리는 것이 가능해지고, 일상의 공간으로 한발이나마 다가가게 된다(고 생각한다). 2003년의 대구지하철 참사 때 “방화범은 장애인”이라는 1면 톱기사를 읽고, 나는 이런 방법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 정도의 소설을 읽는 사람이에요. ‘장애인’이 아니라구요’”

일상을 구성하는 것은 보편적인 것이어야 하고, 보편적인 것은 어떤 수준과 패턴을 통해 형성된다. 그럼 수준과 패턴은 어떻게? 이런 질문에 답하는 것은 재미없을 정도로 당연하다. 젊고, 건강하며, 돈이 있고, 권력이 있는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수준과 패턴이다. 지하철에서 큰 소리로 수다를 떠는 것은 ‘아줌마’들이나 하는 짓이고, 구걸하는 일은 ‘장애인’들이 한다. 잡다한 상품을 파는 일은 아마도 명예퇴직을 당한 아저씨들이나 하는 일이다. 일상은 비일상적이 것에 이름을 붙이고 일상적인 것은 익명으로 만들어 철저히 숨긴다.

우리는 늘 일상에 지겨워하지만, 사실 그 일상이란 지독하게 누군가를 폐쇄시키고 얻어진 것이다. 이름이 없는 것이 편리한 삶이 되어버린 공간에서, 이름을 얻고 튀어나오는 그러한 인간들을 가두어두고 우리의 일상은 조직된다. 나는 내일도 지하철을 탈 것이다. 이름을 버리기 위해 발버둥 치면서, 나에게 말을 거는 ‘아저씨 아줌마’들을 피하려 노력하면서, 내 머리위에 떠 있는 내 ‘일상’들을 동경하면서.

*이 글은 2년전 서울대 장애인권연대사업팀 문집에 실린 글을 다소 수정한 것입니다.

칼럼니스트 원영 (g-restoration@hanmail.net), 에이블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