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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앞자리에 앉는 아이 - 지체장애 6급 송정률씨의 삶(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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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회 2,087회 작성일 09-07-24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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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梧里)정승이라 불리는 이원익은 태종의 아들 익녕군의 현손으로서 명종2년(1547)에 태어나 인조12년(1634)에 88세로 돌아 가셨으니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장수하신 분이다. 이원익은 선조 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과 호조·예조·이조 판서 등의 벼슬을 지냈고, 임진왜란 때 왕의 피난길을 인도한 공으로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그 뒤 영의정에 올랐으나 일본과 화의를 주장했던 유성룡을 변호하다 벼슬에서 물러나기도 했으나 그 뒤 다시 영의정에 올라 전국적으로 대동법을 실시하여 부당한 세금 제도를 고치는 등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폈기도 했다.

그런데 이원익의 키는 3척 3촌(약 1m)이었다. 그래서 이원익은 자신의 작은 키를 조금이라도 감추려고 한 치(3cm) 정도 되는 나막신을 신고 다녔는데 어느 날 유명한 관상가를 만났다.

“아깝다, 아까워! 키가 한 치만 작았더라면 영의정(지금의 국무총리)이 될 관상인데 한 치가 큰 바람에 영의정을 놓쳤구나!” 관상가의 탄식소리를 들은 이원익이 당장 한 치를 높인 나막신을 집어 던지자 그제서야 관상가는 일어서서 공손히 영의정 나리에게 절을 했다고 한다.

이처럼 이원익이 키는 비록 작았으나 정직하고 근면하고 검소한 재상이었으나 집은 매우 가난하여 지붕에 비가 샐 정도였고 양식이 없어 끼니를 걱정할 정도였다. 그런 사실을 안 임금이 쌀과 비단을 보냈으나 “명분 없는 물품은 어느 누가 내려 주어도 받을 수 없다!”며 그 물건을 다시 돌려보내자 임금은 혀를 내두르면서 탄복했다한다.

이원익의 성품은 소박하고 너그러웠으나 소임에는 충실하고 책임감이 투철하였다. 재상을 수차례 거듭하며 평생 벼슬살이를 했으나 거처는 두어칸 오두막집이었고, 아침저녁 끼니를 걱정 할 만큼 곤궁하였다. 말년에 이원익은 오류동에서 왕골을 심고 돗자리를 엮어 식구들을 먹여 살렸는데 70여년을 관직에서 보낸 이원익이 가난을 헤매다가 눈을 감았다는 전갈을 들은 인조는 “정승노릇 40년에 그 토록 가난했단 말이냐?”고 눈물을 글썽이며 관을 짤 나무와 장례비용을 내려 주었다고 한다.

여기서 잠깐, 필자는 장애인단체의 사회복지사다. 오래전 장애인단체의 급여가 너무 적어서 가난하기는 해도 밥을 굶지는 않았다. 드라마에서 정승 집을 보면 종들을 줄줄이 거느린 호화판 생활이었는데 이원익의 녹봉이 도대체 얼마였기에 끼니를 걱정해야 했는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다.

폐일언하고, 이원익의 녹봉을 논할 자리는 아니다. 다만 이원익의 키가 1m정도 이었음에도 70여 년간 관직에 있으면서 영의정을 다섯 번이나 했다하니 사람의 능력은 키하고는 상관이 없을 것 같은데 현실에서는 그렇지만도 않으니 참으로 괴이한 일이다.

송정률(30)씨의 키는 1미터 40센티미터다. 이원익보다는 키도 크고 앞으로 무슨 일을 어떻게 할지는 아직은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나 1981년에 제정된 장애인복지법이 몇 번이나 개정되기는 했지만 장애인복지법 등급기준에 의거하여 지체장애 6급을 받은 사람이다. 장애인복지법에 의하면 여자는 140cm이하, 남자는 145cm이하가 되면 지체장애 6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송정률씨는 부산 해운대구 반여동에서 아버지 송00(2002년 사망)과 어머니 황00씨 사이에서 위로 누나 하나를 둔 둘째로 태어났다. 회사원인 아버지와 주부인 어머니, 그리고 큰딸과 작은아들 등 네 식구 살림은 남부러울 것 없이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이었다.

그 후 안락동으로 옮겨 그가 안남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보니 세상이 달라졌다. 그가 남들하고는 조금 달랐던 것이다. 초등학교 체육시간에 비록 교실지킴이는 아니었지만 체육활동은 언제나 꼴찌였고 교실에서 그의 자리는 항상 제일 앞이었다. 어렸을 때만 해도 체육을 못하는 것이나, 언제나 앞자리에 앉아야 하는 것에 대해서 그냥 그러려니 생각하며 그렇게 고민하지는 않았다.

송정률씨 이야기는 2편에 계속.
이복남 기자 (gktkrk@naver.com), 에이블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