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장애우? 장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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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를 짚고 길을 다니다 보면 일면식도 없는 이에게 반말을 듣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쪽으로 와!" "거기로 가면 안돼!" "어디 가려고 나왔어?"
도움을 주려는 의도인 것을 알면서도 나름 성인으로서의 존중받을 독립적 자아를 가진 나로서는 상대의 나이와 지위에 무관하게 낯선 반말은 그다지 기분 상쾌한 일은 아니다.
나의 비현실적 동안이나 상대의 근본적 진심 따위에 상황의 긍정적 해석을 위한 최면을 걸어보기도 하지만 지팡이가 상징하는 사회적 약자의 본능적이고 반사적인 경계는 그 반말의 타깃이 나인줄 전혀 모른다는 척하는 유치한 결론으로 끝날 때가 많았다.
언젠가 택시기사님과의 대화도 시작은 그러했다.
젊은 친구라는 호칭이 가장 공손한 표현이었을 만큼 그분의 대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단어는 반말의 종결어미로 수렴하고 있었다.
목적지를 묻는 의례적 대화부터 주변경치를 설명하고 연륜으로부터 근거한 덕담을 쏟아내시는 기사님의 이야기들은 친절과 배려가 가득 담긴 인생선배의 정의 표현이었지만 나는 반말에 대한 경계심을 극복하지 못하고 퉁명스런 단답으로 목적지에 닿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님은 주변경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시는 것을 사명감이라도 가진듯 이어가고 계셨고 나의 반응 또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퉁명스러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목적지에 다다를 무렵 점자로 이름을 알려주시던 기사님은 당신이 수십년간 시각장애인 복지에 몸담았던 사람이라며 조언이나 말투가 무례했다면 이해해 달라는 인사를 건네셨다.
그제서야 알았지만 그 분은 평소 선배님들과 은사님들이 자주 말씀해 주시던 시각장애 복지계에선 소문난 어르신이었다.
기사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순간 무너져내린 나의 경계심을 느끼면서 수많은 과거의 반말장면들이 복잡하게 머리를 스쳐갔다.
지나친 경계들! 그것은 어쩌면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내 약점에 대한 열등감이 원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장애인 장애우 장애자 맹인 봉사 소경 등등의 호칭 중 무엇이 옳은지 틀린 것인지 자주 논쟁을 벌인다.
어떤 것은 조선시대 관직으로 유래한 것이니 괜찮고 어떤 것은 성경책에 쓰여 있으니 교회 내에서는 괜찮고 어떤 것은 이름난 교수가 만든 것이니 불러도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언어가 주는 영향력은 너무도 강하고 그 사용은 듣고 받아들이는 이의 입장에서 생각하여야 한다는 것이 바뀌지 않는 내 입장이다.
비하할 의도가 없다면 과한 친분감을 나타내기 위해 장애자 장님 봉사 따위를 일부러 사용할 필요도 없고 특별히 오버할 생각이 없다면 장애우 같이 과한 표현을 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표현의 올바르지 못한 선택은 반말에 대한 나의 경계들처럼 불필요한 오해와 다툼을 초래하기도 한다.
그냥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장애인 정도면 적당하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내가 오늘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그것보다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관한 것이다.
장님이든 소경이든 봉사든 반말이든 받아들이기에 기분 나쁘긴 하지만 조금은 여유 있게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올바른 언어의 선택은 반드시 유도하고 잘못된 사용은 고쳐가야 하겠지만 언어에 너무 매몰된다면 그 뒤에 숨겨진 진심마저도 보지 못하지는 않을까?
대다수는 소수인 장애인들이 어떤 표현에 반감을 가지고 어떤 표현이 일반적인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
그들의 잘못된 표현들은 어쩌면 장애 당사자의 여유 있는 충고 한 마디에 고쳐질 수 있는 작은 왜곡일지도 모른다.
다수는 소수를 존중하고 약자를 높여주었으면 좋겠다.
소수는 다수에 대한 무조건적인 경계를 여유있게 풀어나갔으면 좋겠다.
어른도 아이에게 존대하고 아이들도 어른의 충고를 존중하는 사회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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