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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 끝 장애인 1종운전면허 허용의 감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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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혜진1 조회 1,098회 작성일 15-09-25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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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의 분노를 주체지 못해 기도회를 다니면서도 척수장애인단체 ‘장애극복하나회’를 설립했다. - ‘장애극복하나회’는 1996년 부산척수장애인협회로 변경하였다.

“메리놀병원에 3년을 있었는데 그동안 많은 교우들을 만났습니다.”?

그처럼 척추를 다친 사람들과 의기투합하여 밖에 나가면 일을 한번 해 보자고 했었다. 메리놀병원에는 외국신부가 있었는데 한국에는 장애인복지가 많이 부족한 한 것 같은데 혼자서는 어려우니 힘을 모으라고 조언해 주셨던 것이다.

그는 하나회 회장을 맡았는데 그들이 바라는 것은 1종 운전면허와 휠체어가 다닐 수 있는 편의시설이었다. 하나회에서는 밤에는 생계를 위해 나가시(승용차 영업)를 하면서도 낮에는 차량 봉사를 했다. 그도 포니 운전자가 준 돈으로 중고차를 구입하여 핸드콘트롤을 달았다. 집도 휠체어가 드나들 수 있는 해운대로 이사를 했고, 아내에게 부산역 지하상가에 분식점을 차려 주었다. - 그 때는 매매 가능한 장기임대였는데 분식점을 그만 둔 지금까지도 상가 임대료는 해결이 안 되었다고 한다.

“노동운동을 하면서 ‘돈에 욕심을 부리면 공적인 일을 못한다’고 배웠고, 다른 회원들도 차량 봉사를 하면서도 일체 돈을 못 받게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누구는 돈을 받았느니, 용품 매장도 하고 있었는데 누가 돈을 떼먹었느니 하는 소문이 돌았다.

“의심 받기 싫어서 회장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래도 1종 면허에 대한 기대는 버릴 수가 없어서 혼자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는데 부산장애인총연합회(부산장총)에서 연락이 왔다. 장애인에게도 1종 면허가 허용 되었지만 반쪽짜리라고, 나머지 반쪽을 위한 교통대책위원장을 맡아 달라고 했다.

장애인에게 1종 운전면허는 오래전부터의 꿈이었다. 장애인에게 직업은 중요하지만 장애인이 할 만한 일도 없고 장애인을 받아 주는 직장도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지체장애인은 물론이고 척수장애인도 잘 할 수 있는 택시운전이라도 하고 싶은데, 택시운전은 1종 면허로 제한되어 있었던 것이다. 부산장총에서 노력한 결과 장애인 1종 면허는 1994년 9월 1일부터 시행되었으나 양하지장애인은 제외되었다.

<장애인에 대한 운전면허제도는 1981년 12월 31일 개정된 도로교통법에 의해 1983년 1월 1일부터 시행되어 ‘장애인 운전능력 측정검사’에 통과하면, 필기 및 실기시험에 응시하여 2종 운전면허 취득은 가능하게 되었다. 제도 이전에는 장애인은 외국에서 취득한 국제운전면허증으로 운전을 하거나 무면허로 운전하다가 처벌을 받기도 했다.

1992년 부산장애인총연합회 교통대책위원회(위원장 조창용)의 노력으로 1994년 7월 도로교통법 제45조가 개정되어 장애인에게 1종 면허를 취득할 수 있게 되었으나 양하지장애인은 1종 면허가 불가하였다. 그 후 부산장애인총연합회 2차 교통대책위원회(위원장 김용국)가 결성되어 전국연대로 투쟁한 결과 2000년 1월 1일부터 양하지장애인에게도 1종 면허가 허용되었으며, 아울러 양팔장애인도 허용되었다. - 필자 주>

그는 부산장총의 교통대책위원장을 맡아 여러 차례의 세미나와 공청회를 열었고 서울은 물론이고 전국 장애인단체 투어 등 전국연대를 통해 투쟁한 결과 2000년 1월 1일부터 양하지 장애인에게도 1종 면허가 허용되었다. 그 과정에서 한신대학교 재활학과 오길승 교수가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주최로 열린 `장애인 1종 면허 취득을 위한 공청회'에서 주제발표를 하는 등 학문적인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나중에 오길승 교수가 대통령상에 추천하겠다고 했지만 그는 손사래를 쳤다. 그는 상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던 것이다.

“그 때 평화방송 라디오에서 좋은 일이 있으신 분은 연락을 달라고 하기에 전화를 했는데 ‘장애인 1종 면허……. 하고는 목이 메어 말이 안 나와 울먹였습니다. 사회자도 기다리다가 어이가 없는 지 축하드립니다 하고는 전화를 끊데요.”

그날 전화를 끊고도 하염없이 눈물이 나더란다. 그가 다치고 하나회를 설립하면서 시작한 1종 면허, 10여년 만에 결실을 보게 되어 감개무량하였던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노력했겠지만 그 때 그 심정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런데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을 돌아다니다보니 엉덩이 욕창이 낫지를 않았다. 그는 집에서 조리를 해야 했지만 그날 이후 전국적으로 많은 장애인들이 택시기사로 취업을 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장애인들이 개인택시를 구입하기도 했다.

큰 딸(37살)과 큰 아들(35)은 결혼을 했고 작은 아들(32)은 아직 미혼이다. 아내는 다단계로 빚더미에 앉게 되어 집을 나가고, 그는 아파트가 있어서 수급자도 안 되므로 큰 아들이 보내주는 생활비로 근근이 살고 있단다.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잘 되고 그리고 치매가 오기 전에 (자식들 고생 안 시키게)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원, 별 말씀을. 그는 지금도 그가 다니는 곳의 은행이나 우체국 등의 편의시설이 미미한 것을 볼 때면 개·보수를 건의하여 장애인들이 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장애인복지를 위해 투쟁할 사람이니 그의 소원대로 오래오래 욕창 없이 치매 없이 건강했으면 좋겠다. <끝>